토머스 트웨이츠와 최태윤의 대화
이 대화록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에 참여하는 두 작가 토머스 트웨이츠와 최태윤이 각각 뉴욕과 런던에서 2015년 1월 9일 한 시간가량 화상으로 나눈 대화를 정리한 뒤 최태윤이 주석을 단 것이다.
최태윤 : 안녕하세요.
토머스 트웨이츠 : 네, 안녕하세요.
최태윤 : 만나서 반가워요. 저는 맨해튼의 제 작업실에 있는데, 보시다시피 커다란 창고 건물입니다. 저기 바깥에 허드슨 강도 보이고요. 로어 맨해튼 문화 협회에서 진행하는 9개월짜리 레지던시에 참여하고 있어요.
토머스 트웨이츠 : 네, 반갑습니다. 저의 집도 보여드려야겠네요. 여기가 런던에 있는 제 아파트입니다. 저쪽에 여자친구가 보이실 거예요. 안녕?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건, 세인트폴 대성당이군요! 메리 포핀스도 있고요! (웃음) 사실 그런 건 전혀 없어요. 슈퍼마켓과 주유소는 보일지도 모르겠네요. 이런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.
최태윤 : 우선 일상적인 사물의 ‘탈신비화’라는 개념에서 시작해볼까요. 저는 가전제품의 디자인 과정에 깔린 논리적 사고를 은폐하는 기술적 추상화로부터의 탈신비화를 중요하게 여깁니다.
The Toaster Project by Thomas Thwaites
토머스 트웨이츠 : 이러한 탈신비화 과정을 컴퓨터에 적용하는 것이 흥미롭네요. 특히나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데 사용되는 언어들이 점점 고급화되는 방향으로 추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요. 펀치 카드였던 것이 기계어로 발전하더니, 최근 MIT에서 개발한 언어를 보면 사실상 코딩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수준입니다*1. 거의 영어로 문장을 적어넣기만 하면 연쇄적인 추상화 단계를 따라 차례대로 해석되면서 궁극적으로는 태윤 씨가 하는 (컴퓨터 내부에서 실제 물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) 작업, 말하자면 브레드보드*2에서 이루어지는 전자의 교환에 가까운 것에 이르게 됩니다.
그리고 이것이 제가 <토스터 프로젝트>에서 하려고 했던 것이기도 하고요. 토스터의 역사를 살펴보면, 따분한 일상적인 사물이 그 고유의 디자인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. 토스터의 혁신도 마찬가지죠. 요즘은 팝업 토스터라고 해서 완성된 토스트가 저절로 튀어나오지만, 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. 더 거슬러 올라가면 코드 끝에 달린 전기 플러그를 천장의 조명 소켓에 꽂게 되어 있던 시절도 있습니다.
최태윤 :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, 혹은 연구 조사와 사색적 재평가라는 수단을 통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, 여행의 대상이 되는 특정한 역사적 순간들을 결정하실 때 현재와의 관계가 중요한 고려사항일까요?
토머스 트웨이츠 : 글쎄요, 특정한 시대를 콕 짚기보다는 긴 시간을 훑듯이 살펴보는 것에 관심이 있어요. 현대에서 소비되는 상품들과 불을 처음 만들어낸 원시 인류까지를 쭉 연결해보고자 했습니다.
최태윤 : 그것이 디스커버리 채널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매력이겠지요. 우리 둘 다 유머와 위트에 관심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. 다큐멘터리는 금세 딱딱하고 교훈적이 되니까요.
토머스 트웨이츠 : 유튜브에 올라온 제 강연 영상*3에 달린 댓글을 보면, 그 프로젝트가 충분히 순수하지 못하며, 모든 것을 완전히 처음부터 만든다는 제약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. 하지만 제가 그렇게 했더라면 그다지 재미없고 또한 완전히 불가능한 프로젝트가 됐겠지요.
최태윤 : 말씀하신 것 중 한 가지 언급할 만한 것이 바로 역사의 재현이라고 생각합니다. 컴퓨터를 처음부터 만들기 위해 온라인으로 조사하다 보면, 취미 내지는 공학적 도전 삼아 마치 지금이 1968년인 것처럼 컴퓨터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*4. 저는 그런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고 또 그것들을 존중하지만, 제 관심사는 어떤 다른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었는지를 재발견하는 데에 있습니다. 초기 기계식 컴퓨터*5의 디자인과 운용 방식을 보면 정말 아름답거든요.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실험적으로 운용되었던 아날로그 컴퓨터*6 또한 매혹적이고요. 이런 혼합 신호 처리 방식을 계승한 가장 현대적인 버전의 컴퓨터는 컴퓨터의 아마 모듈러 신시사이저인 것 같습니다. 이러한 과거로부터의 유산은 단지 이진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컴퓨팅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. 인간의 존재방식이라던가, 쉽게 수량화되지 않는 것들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요.
토머스 트웨이츠 : 탐험, 교육, 제작 등의 과정을 이용함으로써 각각의 개별적 과정들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내시잖아요. 그것이 미학적으로 흥미롭게 느껴지는데요, 가면 갈수록 컴퓨터들이 서로 비슷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. 겉보기에는 다 똑같으니까요.
Handmade Computer by Taeyoon Choi
최태윤 : 사회비판, 내지는 활동가적인 접근방식에 비추어 봤을 때는 어떤 입장이세요? 예를 들어 제가 진정한 활동가였다면 애플이나 삼성 제품을 거부하고 직접 랩탑 컴퓨터를 만들어서 리눅스*7를 사용하겠죠. 그렇게 할 수 있다면야 훌륭한 일이지만, 동시에 매우 불편한 일이 될 수도 있어요.
토머스 트웨이츠 : 그렇죠, 모든 것을 다 할 시간은 없죠.
최태윤 : 네, 제 입장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무엇이든 사용 가능한 수단을 쓴다는 것이거든요. 하지만 그러다 보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에 순응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겠죠.
토머스 트웨이츠 : 그러니까요. 솔직히 말하자면 어디 밤에 발이나 뻗고 잘 수 있겠어요. (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난) 독자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거든요. 게다가 그 끝이 어디일까요?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살아야 할 텐데,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살아남으려면 도시로 나와야 할 때가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지요. 또, 저로서는 제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아는 사람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, 제가 속한 세계 밖의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더 흥미가 있습니다.
최태윤 : 본인의 주 활동 영역이 어디라고 보시나요? 주류 미디어와 디자인 연구 같은 틈새시장 사이의 어딘가일까요?
토머스 트웨이츠 : 네, 그런 편이죠. 엄밀히 말해 제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. 글쎄, 예술가라고 여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죠.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염소가 되려고 하는 것에 관한 내용인데요, 굉장히 재미있고 <토스터 프로젝트>보다 훨씬 메인스트림한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.
최태윤 : 저는 갤러리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, 그 잠재력에서 영감을 받기도 합니다.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?
토머스 트웨이츠 : 어려운 이야기네요. 글쎄요, 예술계는 워낙… 기본적으로 미술 산업에 대해 편안하게 느끼는 입장은 아닙니다.
최태윤 : 디자이너로서 교육을 받으셨기 때문, 내지는 디자이너라는 입장을 갖고 계시기 때문일까요?
토머스 트웨이츠 : 그렇죠. 저는 예술학교 출신이 아니거든요. 디자인을 공부하기 전에는 학부에서 생명과학을 전공했어요. TED에서 강연한 뒤로는 방송국에서 “같이 일해봅시다. 이번에는 비행기를 처음부터 만들어보시죠!” 류의 연락을 많이 받았어요. 무언가를 만들고 그에 대해 대중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지만 또한 굉장히 괴로운 경험이기도 했습니다.
최태윤 : 광고나 방송은 일정이 워낙 촉박하고 요구되는 일의 강도도 굉장하죠.
토머스 트웨이츠 : 중간 영역을 찾거나 새로운 대화를 시작할 여지가 전혀 없어 보였어요.
최태윤 : 마지막 질문으로, 도시와의 관계 내지는 우리가 속한 자본주의 환경에 대한 큰 그림을 이야기해볼까요. 체계의 일부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안팎에서 비판하는 중간 영역에 저희 둘 다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.
토머스 트웨이츠 : 도시가 제조업의 심장과 같다고 보는 그런 생각도 있겠지만, 런던은 그렇지 않습니다. 그저 물건을 빨아들이고 쓰레기를 뱉어내는 게 다죠. 그런가 하면 미래를 꿈꾸는, 지역 제조업과 팹랩 같은 것들도 있어요.
최태윤 : 미래를 3D 프린트한다는 말씀인가요? (웃음)
토머스 트웨이츠 : 네. 하지만 그것이 꿈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, 그 어느 도시에서 어느 가게에 들어가더라도 모든 물건이 유통망을 통해 들여온 것이거든요. 이런 제품들의 뒷이야기를 살피다 보면 결국 도시의 뒷이야기도 드러내게 되는 것 같아요.
최태윤 : <토스터 프로젝트>에서는 탄광이라던가 더는 실질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여러 장소를 방문하셨죠?*8
토머스 트웨이츠 : 그렇습니다. 영국에서는 그런 곳들이 관광상품이 됐어요. 몹시 아름답고 버려진 후기 산업사회의 풍경이죠. 도시는 도시 아닌 다른 지역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데 말이에요.
최태윤 : 제게 도시는 컴퓨터와 흡사하게 느껴집니다. 고속도로를 보면 기본적으로 컴퓨터 내부의 데이터 경로와 같고, 건물들은 메모리 블록과 유사하죠. 기회가 된다면 선전*9 같은 제조업 도시에 머물러 보고 싶어요.
토머스 트웨이츠 : 그러게요. 런던이나 뉴욕같이 제게 친숙한 도시들에 대해서는 저도 많이 이야기한 바 있지만, 서울도 그런 식으로 컴퓨터와 같다고 볼 수 있을까요?
최태윤 : 그렇다고 봅니다. 서울은 하나의 굉장한 컴퓨터이면서, 동시에 어떤 점에서는 사악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. 예컨대 재개발과 같은 도시개발 문제가 큰 화두입니다. 이 전시에 참여하는 다른 작가나 단체들을 예로 들자면, 리슨투더시티*10는 한국의 하천 재개발과 시골 지역의 교외화를 다뤄왔고 청개구리 제작소*11는 사회 문제와 수공예 제작을 결합함으로써 풀뿌리 활동과 공예를 통한 사회 참여를 꾸준히 해왔습니다.
토머스 트웨이츠 : 제가 계속 하고 있던 생각은, 도시를 컴퓨터라고 묘사하셨지만 유기체에 비유할 수도 있잖아요? 여러 세기에 걸쳐 유기적인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점진적으로 변화하니까요. 그런데 도시가 컴퓨터와 같다고 말씀하실 때는, 제 생각에 컴퓨터는 이성적으로 디자인된 물건이거든요.
최태윤 : 예리한 지적이네요. 제 생각에 컴퓨터는 단지 논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무엇입니다. 예컨대 혼합 신호 컴퓨터는 논리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, 어떤 프로그램은 자연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거든요. 또한, 진화 연산 분야는 컴퓨터가 성장하면서 스스로를 고칠 수 있는지 다루고 있기도 하죠.*12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말씀하신 대로 도시라는 것이 생명체에 더 가깝고,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놓인 사물들의 형언하기 힘든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.
토머스 트웨이츠 : 젠트리피케이션과 그에 관련된 논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, 컴퓨터나 생태계나 교란되기 참 쉽죠. 예컨대 컴퓨터에서 특정한 전압이 잘못된 곳에 들어가면, 마치 유기적으로 형성된 지역을 밀어내고 반짝이는 유리건물이 들어선 중앙 업무지구를 조성할 때처럼 피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.
도시 재생을 다루는 프로젝트의 관객으로 가장 적합한 사람은 유리 마천루에 있는 갑부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아닐까 싶어요. 실제 변화를 이끌어내려면, 어떻게든 우리 의견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닿아야 하니까요.
최태윤 : 그렇지만 실제 갑부가 예술 작품에 영감을 받아서 도시계획을 변화시킨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나요? (웃음) 도널드 트럼프가 갑자기, “젠트리피케이션이 지독하군! 유리건물도 끔찍하고 말야. 지속 가능한 방식을 택해야겠어” 한다거나. 그럴 리 없겠지만, 만약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너무 좋을 것 같네요.
토머스 트웨이츠 : (웃음) 아마 누군가의 관점을 바꾸는 일은 그런 식으로 짠 하고 일어나지 않겠죠. 문화의 방향이 점진적으로 움직이면서 아주 사소한 변화를 이끌어내기를 기대할 수밖에는 없을 거예요.
최태윤 : 맞아요. 저는 낙관적으로 생각합니다. 오픈 소스와 제작자 문화가 금융과 기술업계 종사자들이 “어, 무조건 더 빠르고 크고 좋은 기술이 전부가 아니군”이라고 깨닫는 데 도움을 주고 있거든요.
토머스 트웨이츠 : 저도 낙관적입니다. 그렇지 않은 날도 있지만 오늘은 낙관적인 기분이네요!
주석
1 http://newsoffice.mit.edu/2013/writing-programs-using-ordinary-language-0711
2 브레드보드: 전자 회로의 시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기판
3 Thomas Thwaites: How I built a toaster — from scratch, 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5ODzO7Lz_pw
4 예를 들어 튜링머신(http://aturingmachine.com/)이나 아폴로 우주선의 유도 컴퓨터(http://klabs.org/history/build_agc/)를 재현하는 사람들이 있다.
5 “기계식 컴퓨터는 전자 부품보다는 레버나 기어와 같은 기계식 부품으로 만들어진다. 가장 흔한 예로는 기어가 회전하며 출력값을 증가시키는 가산기와 기계식 카운터가 있다.” http://en.wikipedia.org/wiki/Mechanical_computer
6 “아날로그 컴퓨터는 전기, 기계, 유압 등 선형적으로 변화하는 물리 현상의 특성을 이용해 연산 중인 문제를 처리하는 형태의 컴퓨터이다. 이에 반해 디지털 컴퓨터는 값이 변화함에 따라 그 수량을 신호로 재현한다.” http://en.wikipedia.org/wiki/Analog_computer
7 리눅스는 자유 및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개발 및 배포 모델 하에 만들어진 컴퓨터 운영체제다. http://www.linux.com
8 “영국에서는 이제 광산업이 진행되지 않지만, 전국 곳곳에 버려진 탄광들이 있다. 일부는 ‘영국’이라는 국가가 존재하기 전부터 채굴되던 곳이지만, 현재는 모두 수익이 맞지 않게 되었다.” http://www.thetoasterproject.org/page2.htm
9 “홍콩특별행정구 바로 북쪽에 있는 중국 남부 광둥 지방의 큰 도시로, [중략] 미화 300억 달러 이상의 외국인 투자가 외국인 소유 혹은 공동 소유의 벤처기업으로 흘러들어 갔으며, 초기에는 투자가 제조업에 집중되었으나 근래에는 서비스 산업으로도 확장되었다. 선전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도시 중 하나로 여겨진다.” http://en.wikipedia.org/wiki/Shenzhen
10 http://listentothecity.org
11 http://unmakelab.org
12 IBM에서 개발한 칩은 뇌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컴퓨터 구조를 취했으며, 1백만 개의 뉴런과 2억5천6백만 개의 시냅스를 장착하고 있다. http://www.research.ibm.com/cognitive-computing/neurosynaptic-chips.shtml#fbid=cZrHhMsZEeQ
사물학Ⅱ: 제작자들의 도시
기획 및 진행: 손주영, 이현주
도록 디자인, 신해옥, 신동혁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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